신과 신, 그 속에 인간
영화 곡성은 '악귀와 수호신'의 대결 속에 흔들리는 인간의 허약한 마음과 근원적인 공포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곡성은 낯선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나타난 후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 사건들로 발칵 뒤집힌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경찰은 수사 후 집단 야생 버섯 중독으로 결론을 내리지만 이 모든 사건이 그 외지인 때문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불안한 소문과 의심이 막을 도리 없이 퍼져 나가고 마을은 온통 음산하고 흉흉한 기운에 잠식되어 간다. 주인공 종구(곽도원)는 현장의 목격자인 무명(천우희)을 만나고 난 후 외지인에 관한 소문에 확신을 갖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딸 효진(김환희)이 사건의 피해자들과 비슷한 증상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하자 종구는 외지인과 무속인 일광, 무명 사이에서 효진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서고 그 속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하는지 혼란에 빠진다.
곡성은 줄거리에서도 보이듯 종구네 가족을 둘러싼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의 대결을 보여준다. 악귀와 수호신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외지인/일광과 무명은 종구를 사이에 두고 대립한다. 신과 신의 사이에서 한낱 인간에 불과한 사건의 피해자들은 그저 악귀의 유혹에 빠져 현혹당하고 환각을 보고 조종당한다. 이것은 종구와 효진 역시 다르지 않다. 영화에서 산 사람의 영혼을 악귀의 제물로 바치는 과정은 다섯 단계로 이루어진다. 제물로 선택된 인간의 물건을 외지인이 가져와 저주를 내리면 그 사람은 피부병을 앓기 시작하며 평소와 다른 말과 행동을 하게 되고 이 모습을 보고 귀신이 들렸다고 생각한 가족들이 일광에게 굿을 내려달라 하면 일광은 귀신 쫓는 굿으로 가장하여 실제로는 저주받은 사람이 악귀의 허주가 되는 내림굿을 하게 된다. 그로 인해 허주가 된 사람은 악귀에 조종당하여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죄를 지은 영혼은 외지인과 일광에게 사진을 찍힌 후 영원한 악귀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종구 역시 효진을 구하기 위해 외지인을 찾아가 죽이려고도 해 보고, 일광을 찾아가 온갖 굿을 다 해봐도 소용없다. 수호신인 무명은 효진이 악귀의 제물이 되지 않도록 나름의 방법으로 결계를 쳐 주고 일광의 행위를 방해하지만 종구는 일광의 말에 현혹되어 그에게 굿을 부탁하게 된다. 결국 효진을 구하기는커녕, 수호신 무명보다 악귀인 외지인과 일광의 말에 현혹되어 흔들리다 악귀의 제물이 되어 버린다.
여러 해석이 가능한 오컬트, 곡성에 대한 반응
-곡성은 내가 봤던 한국 영화 중 가장 미친 영화 중 하나다, 우울한 광기
-살인, 신체 훼손, 버섯, 마법, 좀비, 악마 그리고 황정민. 곡성은 2016년 칸에서 황홀함을 준 첫 작품이다
-곡성은 어둡게 웃기지만 필요할 때는 매우 심각하다. 샷 또한 아름답다
-미쳤다, 한국 영화의 절정이다
2016년 칸에서 상영되었던 곡성에 대한 해외 반응은 뜨거웠다. 국내 역시 68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뜨거운 입소문과 함께 흥행했다. 여러 방송과 콘텐츠들에서 곡성에 대한 패러디가 숱하게 재생되었고 영화 전체의 내용을 두고 여러 가지 상징과 해석을 나누는 이야기들도 많이 회자되었다. 한 번만 보고는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 상징들도 있어서 같은 내용을 두고도 다른 해석을 나누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홍진 감독의 GV 인터뷰들을 보면 감독이 말하는 정답이 있긴 하지만 관객이 해답을 알고자 계속 의심하고 파헤치려는 모습까지도 감독의 계산에 있다고 보는 게 맞는 듯하다.
단순히 귀신이나 악령만 나오는 공포 영화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두려운 공포를 그렸다는 점에서도 단연코 한국 영화 최고의 오컬트 영화이지 않을까.
인간의 허약한 믿음에 대한 비판
영화의 후반부에서 일광이 효진을 살리는 굿이 아닌, 무명에게 살을 날리는 굿을 했을 때 효진의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굿판을 엎어버리는 종구는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무명을 마주한다. 무명은 종구에게 새벽닭이 세 번 울 때까지 집에 가지 말라는 마지막 조언을 듣지만, 이미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게 된 종구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명의 조언대로 종구가 닭이 세 번 울고 난 뒤에 갔다면 가족을 지킬 수 있었을까? 여러 번 고민을 해 봐도 결론은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간다. 아니다, 인간은 애초에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그 말을 믿기에는 공포 앞에서 인간은 너무 무력하기 때문이다.
곡성이 특히 종교나 믿음, 기독교적인 소재, 무속신앙 등을 차용한 것과 관련하여 말하면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완전무결한 믿음'은 인간에겐 어려운 것이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를 배반했고 아담과 이브는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었으며 예수의 제자 도마는 그의 손을 직접 접촉하기 전까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 그리스신화 속 판도라 역시 상자를 열지 말라는 신의 말을 거역하고 호기심과 의심을 참지 못해 상자를 열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말하는 한 가지는 인간이란 원래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끝없이 의심하고 끝없이 실수를 저지르는, 또 불안해하는 그 본성이 곧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기에 종구의 비극이 그저 '불운'이라고만 볼 수 없고 그의 행동을 비난할 수도 없다. 그저 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의 장난에 내가 선택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초월적 존재 앞에 끌려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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