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후반, 그 시절 청춘 로맨스의 향수
20세기 소녀는 90년대 레트로한 감성을 배경으로 첫사랑과 우정 그리고 그 시절에 학창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아련하고 저릿한 추억을 예쁘게 표현하는 영화이다. 주인공 보라는 연두라는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연두는 심장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잠시 떠나 있게 되고, 미국으로 가기 전 우연히 만나게 된 백현진이라는 소년을 좋아하게 된다. 연두는 보라에게 자신이 학교에 없는 동안 백현진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고 보라는 백현진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내느라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백현진의 단짝인 풍운호와 같은 방송부원이 되고 운호와 부딪히는 일이 많아지면서 보라는 자연스럽게 운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생긴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연두와 이야기하는 도중, 백현진이라 알고 있었던 연두의 사랑의 상대가 사실은 풍운호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보라와 연두는 예기치 못한 삼각관계가 되어 혼란스러워한다.
영화는 90년대 후반, 21세기를 앞둔 시점을 배경으로 해서 2000년대가 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이야기나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음악과 비디오, 삐삐, 공중전화 등 레트로한 소재들이 많이 나온다. 그 시절 한 번쯤은 짝사랑을 경험해 보거나 풋풋한 연애를 해 봤던 사람들은 주인공 4인방의 사랑과 우정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거나 오랜만에 그 시절을 떠올리며 향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분위기와 감성이 한때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대만의 청춘 로맨스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첫사랑의 실패와 아픔, 설렘과 그리움, 추억 등 학창 시절의 로맨스가 주는 아련하고 순수한 감성은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영화 속 소소한 의미들
사실 크게 상징이나 해석이 필요한 영화는 아님에도 몇몇 소재들에서 그 의미를 곱씹어 보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영화의 결말까지 보고 나면 오프닝의 장면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오프닝에서 보라의 아버지는 해외에서 온 우편물을 받게 되는데 이때 발신인이 '조셉'으로 되어 있다. 운호가 살아 있었다면 풍운호의 이름으로 편지가 왔을 테지만 그게 아니어서 동생 조셉의 이름으로 편지가 보내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사실 운호가 외국으로 가서 조셉으로 이름을 바꾼 게 아닐까란 생각도 잠시 할 수 있지만 결말까지 본 이후 오프닝을 다시 떠올린다면 운호의 미래가 좋지 않음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두 여주인공 보라와 연두는 이름이 색깔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그 색이 보색을 이룬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를 보완하는 둘도 없는 친구이기도 하지만, 극명히 반대된다는 점에서는 가장 강한 사랑의 라이벌이 된다는 점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풍운호 역시 그가 자주 입는 옷이 주로 파란색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보라와 파랑을 섞으면 바이올렛 색이 된다. 바이올렛 색이 일반적으로 그리움을 상징한다고 볼 때 보라가 20세기를 넘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운호를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에도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청춘
오프닝에 나왔던 편지는 운호의 동생 조셉이 사진전을 열어 보라에게 보낸 초대권인데 보라는 그곳에서 90년대 학창시절을 보냈던 자신을 마주한다. 그리고 부모님의 집 비디오 가게에서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열어 보는데 그 안에 곧 만나러 간다며 21세기의 보라가 보고 싶다고 하는 운호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재회하지 못했고 보라는 한 번도 21세기의 자신을 운호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운호가 죽게 되면서 운호 역시 21세기의 자신을 보라에게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둘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에는 조금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비디오카메라 속 보라의 모습은 더 슬프게 다가온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조금 더 솔직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양보하고 애써 본심을 숨겨야 했던 그들의 모습이 한 세기가 지나서 되돌아 보면 아쉽고 슬프고 아프게 느껴진다. 운호와 보라가 서로의 감정에 조금 더 솔직했다면 그들의 마지막이 달라졌을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청춘이고 10대이지 않을까 한다. 어리숙하고 감정 표현에 서툴고 사랑보다 우정이 더 먼저일 수 있는 풋풋한 10대이기에 어쩔 수 없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더 그립고 돌아가고 싶고 영원히 머무르고 싶기도 한 학창 시절. '20세기 소녀'는 그런 의미에서 영원히 마음 한 편에 20세기 소녀로 살 수밖에 없는 보라를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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